철학과 세계관은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체험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1. 텍스트는 자기 체험의 필어와 용광로에 녹여서 다시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서사보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현재의 두터움이 글쓰기의 질을 결정한다. 현재의 두터움이란, 삶의 이야기와 고통, 저항, 비판정신이 얼마나 담겨있고 얼마나 현재를 두텁게 만들어주는 가를 의미한다. 아마 해석과 설명의 풍부함을 이야기하는 그 두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감수성의 질을 결정하는 경험을 강조하는 말은 공감한다.

2. 하지만 이런 질문은 든다. 경험이 많은 사람만이 글의 질이 높다면 경험과 나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이와 인격의 관계는 ? 경험은 찾아나서는가? 찾아오는가? 그 경험이란 '씀'에서 나오지 않을까? '표현'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3. 지성훈련을 해나간다는 것은 자칫하면 공부만 하고 머리로 하는 훈련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지성의 개발은 고독과 침묵과 주의집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지성개발엔 영성개발에 필요한 부분이 함께하는 것이다. 지성과 영성은 연결되어 있다. 이는 곧 정지된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공부만 하는 삶, 참여만 하는 삶, 고독만 찾는 삶은 틀린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에 총체적으로 균형잡혀 나가야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 쓰도록 충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두 가지 다이다. 고독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결국 이에 대한 대답은 소통으로부터출발해야한다. 나와의 소통이든, 하나님과의 소통이든, 세상과의 소통이든 어떤 대상과의 연결점 없이 독백만 늘어놓는 글쓰기는 의미있는 글쓰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또한 든다. 더 나아가 독백만 늘어놓느다 할지라도 그 글스기 안에는 어떠한 소통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5. 글쓰기와 행동, 그 사이에 어떠한 것이 있을까? 글쓰기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라면 행동과 삶이 드러난 글쓰기여야 한다. 즉 이말은 몸 전체로 떠올리는 생각 즉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몸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를 담은 글쓰기와 생각을 담은 글쓰기는 다르다. 철학과 세계관이 드러난 글쓰기라면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드러낸 글쓰기여야 한다. 그래서 진짜 글쓰기란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몸과 행동까지도 실천까지도 담고 있는가?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가? 글을 쓰기전과 후에도 끝없이 돌아봐야 하는 책임까지도 지니고 있는 무거운 것 같기도 한다.

6. 신대표는 강신주의 감정격발에 나온 노숙인의 묘사를 지적하며 누군가를 나의 인식박스에 넣는 일반화를 피해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 한다. 한사람 한사람을 고유하게 보는 세계관이 먼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위함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에서 다시한번 질문이 생긴다. 세계관이란 끝 없이 변하고 하나를 인지하는 순간 완벽히 알아갈 수 없는 과정속에살아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어차피 사람은 실수를 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7. 그리고 이는 다시 설명된다. 그래서 글쓰기는 겸손해야 한다고 말이다. 인식과 인식대상과의 관계성을 끝 없이 돌아보며 글을 써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복지관 봉사를 통해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 투쟁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삶을 마주하며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하고, 이런 체험이 무슨 의미가 있나 노력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투쟁현장에 갔을 때 교수님께 던졌던 질문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는, 결국 실천과 체험에 대한 한계를 느꼈던 것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실천과 체험은 같은 의미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느끼려 해도 느낄 수 없고 같은 경험을 한다 해도 강도는 또 다를 것이다. ‘공감이라는 감수성에 대한 고민 역시 커진다. 공감은 결국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내 경험에 빗대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 자체도 참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튼 결국엔 그런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교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저 도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리고 글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용기 있게 그 순간에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나 의견이 다양하고 가치가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안에서의 글쓰기란 그러한 용기가 더 필요할 것이다. ‘아니라고혹은 틀리다고지적 받을 수 있고 또한 틀릴 수 있지만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살아낼 수 있는 능력과 글을 쓸 용기도 함께 가야한다. 그래서 순간순간에 모르는 것에 진실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존재가 담기고 철학이 담기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8.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비결은 대상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 표현을 결정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 대상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나에게 참 많은 함의를 가져다 주는데, 타자에게 표현의 기회를 주고, 자기 자신도 의문을 품고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의문의 고통과 고뇌를 함께 느껴가는 삶이 함게하는 것 같다. 결론을 미리 알고 있다고 혹은 추측하며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함께함이라기 보다는, 질문을 진심으로 질문으로 여기고 그것을 내 삶에 끌어와 진지하게 함께 고뇌하며 가지게 되는 나의 삶의 고뇌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짜 함께함이 아닐까.


과학과 인간소외 그리고 성경

 

1. 코딩 열풍의 바람이 불고 있다. IT 산업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분야 중 하나로 주목받기 때문이다. 대학은 인문학을 소외시키고 실용주의적 학문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시작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최근 인문학 판매량이 2배 가까이 늘었고, 백화점에서는 인문학 강좌를 작년보다 20%를 늘렸다. 소비자의 욕구에 민감한 시장에서 일어난 일들이니 인문학에 대한 목마름이 어떠한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영상매체 콘텐츠 역시 이에 부응한다. 실용, 직업, 기술에 민감한 사회에서 IT의 발전과 동시에 증가한 인문학의 수요가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고민으로 책을 집어 들기 시작했을까?

 

2.미처 준비되지 않은 과학의 진보 앞에 나타난 인간소외가 불안을 야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최저임금 인상과 동시에 외식업계에 무인화 기계가 도입되면서, 알바자리가 급격히 감소했다. 제도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19세기 초, 기계를 부수며 이 불안에 저항했던 러다이트 운동처럼 우리는 같은 공포를 마주한다. 과학과 성경의 대화를 저술한 복음주의 신학자 버나드 램 역시, 과학이 꽃 피지만 인간 실존의 의문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신학의 힘이 무너져 가는 불안의 시대를 살았다. 그의 바람은 복음주의와 과학이 성경을 탁월하게 다루던 19세기 말의 전통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힘을 잃은 성경의 무력함과 목적은 없고 기술로만 나아가는 행렬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오해와 과학의 한계를 제시하며 과학과 성경이 서로의 필요를 보기 원했다.

 

3. 그는 성경과 과학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말로 표현하지만 사실 이는 과학에 복음이 왜 필요한가?”로 바꾸어 읽어낼 수 있다. ‘주류로 자리 잡힌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는 신비화되었던성경은 불필요한 개입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신빙성과 권위는 언제부터 사라져 갔을까? 19세기 과학의 발전은 권위적인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항을 뿌리로 개신교 정통주의와 대립하게 되었고, 급작스러운 근대과학의 발전에 대응을 준비할 수 없었던 초정통주의는 적대시하는 것만으로 반응했다. 그렇게 과학과 복음주의 간 분열이 거세진 때, 과학 분야의 교육은 발전을 이룩해내었고 성경은 이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과학에서 소외받게 되었다. 주류에서의 배제 속에 성경은 반과학적인 것으로 여김 받는다. 그런데 정말 반과학적일까?

 

4. 우리는 성경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접근한다. 반과학적이라는 특성을 근거로 성경은 과학과 대척점에 놓인다. 하지만 성경은 전과학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일뿐, 반과학적이지 않다. 성경이 반과학적이지 않다는 근거는 점진적 창조이론을 통해 설명된다. 램은 성경과 과학이 대척점이 아닌 긍정적 관계에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점진적창조론은 신의 창조를 즉성적 창조파생적 창조로 나누어 설명한다. 세상은 설계자가 완전한 형상고안, 계획해 낸 상태인 즉성적 창조와이후에 법칙과 체계에 따른 파생적 창조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는 생명의 진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고 자연세계가 체계와 법칙적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론과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 성경은 반과학적이 아니다. 하지만 유사성을 찾는 것에만 주력하는 것이 과학과 성경이 화해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과학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5.과학은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는 환원주의적 사고를 지닌다. 이 과정에서 사실들은 파괴되기도 하는데, 양심이 심리적 현상으로 정의되는 환원이 그 예다. 더 나아가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한계가 드러난다. 과학적 사고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실존적 의문에 답을 해주지 못한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초월자에 대한 기대희망에 대한 경로를 가로막혔다. 이제 그 몫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모든 걸 짊어진 우리는 모두 불안하고 피로하다. 사람들은 이 질문을 인문학에서 찾으며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힘을 잃어버린 복음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방황하고 있다.

 

6. 과학은 발전한다. 하지만 철학과 목적이 결여된 방향 감각 없는 과학의 발전 앞에 인간이 설 자리는 사라져만 가고, 성경은 힘을 잃은 채 놓여있다. 불안한 사람들은 이제 인문학에서 인간의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여기, 성경에 대한 많은 오해가 놓여있다. 우리는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봄으로써 과학이 만들어 낸 불안을 잠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열광을 멈추고 인문학에 묻고 있다. ‘기술의 진보 속에 인간은 행복한가?’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이제 성경을 들고 복음주의자들이 대답해야 할 때이다.

 

 

 

 

 



비정규직과 직업소명 

1. “먹고 살려고요. 찍고 돈 받고 반복하는 일에서 자아실현은 불가능해요.” 마트 노동자라는 직업을 두고 투쟁을 긴 시간동안 이어가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A마트 노조대표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 통계는 32.9%(17.08기준) 로 국민의 약 3/1의 수치다. 분업화되고 전문화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과 비정규노동은 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며 노동조합이 신의 존재여부는 신경도 쓸 겨를 없이 생존을 위해 투쟁을 벌이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소명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2 개인이 세계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여겼던 베버에 따르면 분업화되고 전문화 된 노동환경에서 직업과 소명의 결합은 비현실적인 요구처럼 들린다. 베버에 따르면, 직업개념은 루터로부터 출발했다. 루터의 자신의 번역서를 통해 처음으로 직업개념을 사용했다. 루터의 정신에서 유래된 이것은 칼뱅을 통해 조직적 윤리 생활양식으로 강화되었다. 이 특징은 금욕적인 자본의 특징과 맞물려 시민 계층적 경제에토스를 만들어 내었고 전문 직업 노동에 삶을 한정 시키는 일상생활양식을 갖춘 금욕적이고도 조직적인 시민계층을 만들어 내었다.

3. Beruf 독일어, calling이라는 영어 단어는 직업·소명을 함께 쓰는 단어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렇게 쓰이는 직업의 개념은 루터로부터 출발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민족과 달리 이외의 가톨릭이나 고전적 고대에는 이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루터가 자신의 번역서를 통해 처음으로 직업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세속적 일상 노동은 신이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교리를 통해 강화되었다. 오늘날의 의미에서 직업 개념은 성서번역에서 원전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4 .직업소명은 칼뱅의 예정론과 함께 더 강화되어 발전 되었다. 루터는 개별적으로 세속적 노동을 통해 소명을 이루어가며 신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칼뱅은 루터와 달리 세속적 노동을 조직적으로 합리화된 윤리적 생활양식으로 써 자리 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특징은 금욕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질서를 부여했다. 청교 주의적 교리의 토대가 된 이 특징은 노동을 통해 재산을 증식해야 한다는 책임감신의 영광을 위해 재산이 줄지 않도록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자본주의의 자본증식 특징과 맞물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하게 되었다.

5. 베버는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시키고, 그 결과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 전제조건이 된다.”라고 오늘날과 시민 계층적 인간성을 표현한다.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선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이 주인이 되어 사회는 더욱 분업화 되고 시민 계층적 에토스를 가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인간성을 포기하고 있다. 이제는 소명으로서 직업을 이루고 싶어도, 이루어 내기 힘든 비정규노동이 만연한 노동환경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직업소명이라는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가 발전했지만, 우리는 이 시민 계층적 경제 에토스와 현실 구조의 부조화 안의 불일치 속에 살고 있다.

6. 프로테스탄트로부터 만들어져온 세속적 직업에서의 의무 이행은 조직적 직업윤리로 발전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와 친밀성을 가지며 직업 전문적이고도 금욕적인 시민 계층적 에토스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분업화되고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시키는 현실 속에서 직업소명은 이루어내기 어려운 뜬 구름이 되었다.

 


세속적 금욕주의와 탈근대 (퇴고 전 서평)

노란색으로 물들었던 광장은 이제 무지개빛으로 물 들어 간다. 최근 sns에 퀴어축제의 사진과 함께 폭력을 고발함과 동시에 사랑이 답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윤리와 이웃사랑이라는 그 어딘가에서 해매고 있었다. 탈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는 인간, 가치, 사랑이라는 언어의 필요를 요구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수 많은 배제와 구별 짓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공적영역에서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베버는 세속적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그에 맞게 생활양식이 발달했는지 이 책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형태는 직업소명을 토대로 조직적 윤리적인 생활양식의 에토스와 결합되어 발전되어 왔다. 더 나아가 칼뱅주의 사상은 더 강력하고 엄격히 체계성과 조직성을 보이며 자본주의를 만나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민 계층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근대의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이웃사랑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탈근대사회에서 베버가 말한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한 요소들을 살펴본다면 타자를 보는 근대인의 관점에 시민 계층적 에토스의 요소가 녹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할 지 방향이 보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형태와 자본주의 정신 간의 법칙적 귀속을 해방시키며선택적 친화력 의 관계에 있다. 19세기 중엽 무렵까지 선대업자의 경영은 자본주의적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었지만 태도, 관계, 노동량, 이윤율 등을 고려한다면 고도의 윤리와 금욕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 에토스와는 대비되는 전통주의적 에토스였다. 이는 직업소명의 옷을 입은 근대자본주의 에토스가 등장함에 따라 파괴되는데 이 현상은 자본주의 형태와 자본주의 정신의 분리가 가능함을 증명한다.

 

물론 이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피터 버거의 타당성 구조개념이다.현대 서구문화와 기독교,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저술한 레슬리 뉴비긴은 위의 개념을 빌려 사회가 어떤 신념을 타당하게 여긴다는 말은 그 사회의 타당성 구조를 바탕으로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 타당성 구조로부터 자본주의 형태와 자본주의 정신의 법칙적 구속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어 복음이 타당성 구조를 발생시킨다.” 며 다시 관계의 귀속성을 뒤엎는다. 이는 형태와 정신이 적합한 관계에 있지만 법칙적인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들의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관계성을 보여주는 일례이며 베버의 관점에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칼뱅의 예정설을 통해 이 금욕주의는 직업소명아래 더엄격하고 인간적 위안이란 존재하지 않는 조직체계적 직업노동윤리의 합리화 과정과 힘이 강화된다. 청교주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비합리적 충동의 억제를 강조하는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근간을 마련한다. 부를 비속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영리 이해를 추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신의 뜻으로 합리화되었다. “청교주의적 에토스가 자유노동의 합리적인 조직에 기반 하는 시민 계층적 경제에토스가 된 것이다

베버는 정신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이라는 니체의 표현을 빌려서 근대 자본주의의 인간상을 시민계층을 자율적 주체로 재정의 하면서도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체념과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이야기한다. 개인주의적, 자기 규율적, 금욕주의적, 전문 직업 노동적인 특징을 지니는 근대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성은 이웃사랑이 필요한 이 시대에 타자를 보는 우리의 관점에 어떻게 작용할까?

 

세속 금욕주의 정신과 그것을 체계적이고 소명적으로 직업 노동으로 풀어내는 특징이 선택적인 삶을 부여받은 이들이 그러지 못한 이들을 이분법적으로 보았고 이는 분파를 형성할 정도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볼 때 그 단절을 통해 이는 근대인의 특징과 타자를 보는 관점의 연관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또한 광기가 신의 은총과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라면, 기존의 실천적 의식과 확립된 규범을 위반하는 이들이 광인이라는 인식에서 그들의 존재를 수용할 수 없다고 여겼다.” 는 푸코의 주장은 실천적 의식과 규범이 구별과 배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합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광인들이 수용되어 강제적으로 노동을 하게 된 것은 노동의 성스러운 가치를 이념화 하는 부르주아 권력과 사회의 윤리적 명분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는 직업소명에 따른 강력한 조직체계적 윤리 요소가 구별과 착취를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보이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의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사실을 금욕주의의 발전 과정과 자본주의와의 결합과정 통해 근대인의 정신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논해보았다. 어쩌면 이 세속적 금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시민 계층적 에토스는 타자를 보는 현대인의 관점에 영향을 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탈근적 조류에서 배제와 구별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베버는 근대적 인간성을 가진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이를 과제로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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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투쟁의 파레시아

 

1. 광장을 촛불로 물들도록 만든 거센 추위와 그럼에도 불을 피워낸 힘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국가권력에 한 없이 약해보였던 우리는 두 손에 촛불을 쥐고 그들에게 진실 말하기를 소원하며 초를 들었다그리고 2018년의 한국은 난민수용에 대한 담론으로 들썩이고 있다이제 촛불을 들고 진실 말하기를 외치던 우리는 난민에게는 권력을 가진 자다난민들은 우리에게 진실 말하기를 행하고 있을 것이다푸코는 이 진실 말하기를 파레시아라는 어원에서 찾는다이는 약자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 진실을 말할 권리로서 사용되었다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모두가 권력자이자 약자인 사회다과연 우리 중 누가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을까?  푸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파레시아는 무엇이며 그것은 이 혼란을 잠식시켜줄 수 있을까?

 

2. 이런 혼란 속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비판이란 무엇인가와 주체의 해석학의 저자이자권력에 힘에 대한 통찰로 유명한 철학자미셸 푸코 역시 2018년을 사는 우리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고대 철학을 통해 담론과 진실의 저술하며 파레시아의 계보를 통해 파레시아 실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권유한다진실과 개인의 관계를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전환하는 서술이 인상적인데이를 위해 이 서평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와 견유주의 파레시아의 실천적 관점에 주목해서 쓰도록 하겠다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자의 조건은 말하는 이와 말하는 이의 삶과 행동이 통합되는 존재론적 조화를 갖추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는 진실 말하기의 자격을 부여하기에 꽤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3.이 매력적인 파레시아는 옛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다누가 진실 말하는가’ 의문은 옛 사람들에게도 있었다특히 민주정에서 파레시아는 민중에게 아첨하는 이들과 대립되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스승을 어떻게 확신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맞이하는데아첨에 예민한 이들에게 진실과 삶의 방식이 조화롭게 일치되는 존재론적 자질을 갖춘 자가 진실 말하기의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도 그렇다우리는 성실함을 이야기할 때 실제로 일찍 온다고’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아침 일찍 나오는사람을 더 신뢰한다이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가 설득력이 있음을 증명한다그런데 푸코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에 견유주의의 파레시아 특성을 얹으며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가 가지는 한계를 서술한다푸코는 왜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에서 그치지 않았을까?

 

 

4. 견유주의자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자기돌봄에만 머무는 파레시아는 양면성을 지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철학적 장으로 넘어온 파레시아는 실천적 장의 전향으로 논의된다. ‘견유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실천적 회심에 관심을 갖는다견유주의 자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와 동일하게 시민들의 삶에 질문을 부여한 반면 기성 질서에 반응하는 것에 있어서는 달랐다푸코가 이들을 “'발화하는 신체'를 가진 존재로서 이들의 비언어적 퍼포먼스는 실존적 기능을 갖는다.”라고 그들을 표현할 만큼 그들은 무비판적 설교와파문을 일으키는 행동도발적인 대화특히 종종 비언어적 퍼포먼스를 통해 기성 질서에 대항하여 진실을 표현했다그들의 전략은 상대 대화자로 하여금 진실을 발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내면화해 자기 안에서 자기 내면의 결점과 끝없이 싸우게끔 하는 것이다.

 

5. 견유주의자가 투쟁을 내면화 하도록 파레시아를 행하는 이유에서 우리는 진실과 자기의 관계가 하나의 권력을 생산해낼 수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만으로 완전한 파레시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이제 아첨하는 자는 '자신이 된다자기 돌봄은 나르시시즘으로 환원되지 않고거침없는 말로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이제 권력이 생산될 가능성이 보인다자신과 진실과의 관계는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설명이 환원이 가능해진다자기 돌봄을 이미 행하고 있는 가 권력의 생산자가 될 수도 있으며타인이 만들어내는 권력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어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그렇다면 이제 파레시아는 어떤 형태를 띄어야 할까이제 파레시아에서 투쟁과 저항은 빠질 수 없다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의 생산지인 내면과 투쟁하고 저항하되자신에 대해 재판하지 않고 창조성을 가지고 드러난 권력에도 저항하는 힘을 얻어야 한다.

 

6. 이제 자기돌봄이라는 철학적 파레시아는 투쟁과 저항이 가미된 파레시아가 된다진실과 자신의 관계는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우리 자신은 약자이자 권력이며 우리는 누가 진실말하기의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다이런 혼란 속에서 푸코는 투쟁과 저항의 내면화를 하되 자기와 진실과의 관계의 조화는 또 하나의 권력을 생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니심판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되 더 능동적으로 그 힘을 재활성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성을 갖추고 수련하라고 말이다이 수련을 통해 우리는 진짜 우리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을 억압하는 드러난 권력을 길들 일 줄 아는 힘과 권력이 선용될 수 있도록 하는 창조성을 지닌 저항의 기술이 생길 것이다.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 나온 날
사실은 끌려나온 날
그래도 좋아
엄마랑 걷는 서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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