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투쟁의 파레시아
1. 광장을 촛불로 물들도록 만든 거센 추위와 그럼에도 불을 피워낸 힘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국가권력에 한 없이 약해보였던 우리는 두 손에 촛불을 쥐고 그들에게 ‘진실 말하기’를 소원하며 초를 들었다. 그리고 2018년의 한국은 ‘난민수용’에 대한 담론으로 들썩이고 있다. 이제 촛불을 들고 ‘진실 말하기’를 외치던 우리는 난민에게는 ‘권력’을 가진 자다. 난민들은 우리에게 ‘진실 말하기’를 행하고 있을 것이다. 푸코는 이 진실 말하기를 ‘파레시아’라는 어원에서 찾는다. 이는 ‘약자’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 진실을 말할 권리로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모두가 권력자이자 약자인 사회다. 과연 우리 중 누가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을까? 푸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파레시아는 무엇이며 그것은 이 혼란을 잠식시켜줄 수 있을까?
2. 이런 혼란 속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주체의 해석학』의 저자이자, 권력에 힘에 대한 통찰로 유명한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2018년을 사는 우리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대 철학을 통해 『담론과 진실』의 저술하며 파레시아의 계보를 통해 파레시아 실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권유한다. 진실과 개인의 관계를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전환하는 서술이 인상적인데, 이를 위해 이 서평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와 견유주의 파레시아의 실천적 관점에 주목해서 쓰도록 하겠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자의 조건은 “말하는 이와 말하는 이의 삶과 행동이 통합”되는 존재론적 조화를 갖추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는 ‘진실 말하기’의 자격을 부여하기에 꽤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3.이 매력적인 파레시아는 옛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누가 진실 말하는가’ 의문은 옛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특히 민주정에서 파레시아는 민중에게 아첨하는 이들과 대립되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스승을 어떻게 확신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맞이하는데, 아첨에 예민한 이들에게 진실과 삶의 방식이 조화롭게 일치되는 ’존재론적 자질‘을 갖춘 자가 진실 말하기의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성실함’을 이야기할 때 실제로 ‘일찍 온다고’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아침 일찍 나오는’사람을 더 신뢰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가 설득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푸코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에 ’견유주의‘의 파레시아 특성을 얹으며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가 가지는 한계를 서술한다. 푸코는 왜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에서 그치지 않았을까?
4. 견유주의자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레시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돌봄‘에만 머무는 파레시아는 양면성을 지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장으로 넘어온 파레시아는 실천적 장의 전향으로 논의된다. ‘견유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실천적 회심’에 관심을 갖는다. 견유주의 자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와 동일하게 시민들의 삶에 질문을 부여한 반면 기성 질서에 반응하는 것에 있어서는 달랐다. 푸코가 이들을 “'발화하는 신체'를 가진 존재로서 이들의 비언어적 퍼포먼스는 실존적 기능을 갖는다.”라고 그들을 표현할 만큼 그들은 무비판적 설교와, 파문을 일으키는 행동, 도발적인 대화, 특히 종종 비언어적 퍼포먼스를 통해 기성 질서에 대항하여 진실을 표현했다. 그들의 전략은 상대 대화자로 하여금 진실을 발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내면화해 자기 안에서 자기 내면의 결점과 끝없이 싸우게끔 하는 것이다.
5. 견유주의자가 투쟁을 내면화 하도록 파레시아를 행하는 이유에서 우리는 진실과 자기의 관계가 하나의 권력을 생산해낼 수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만으로 완전한 파레시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제 아첨하는 자는 '나' 자신이 된다. 자기 돌봄은 나르시시즘으로 환원되지 않고, 거침없는 말로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제 권력이 생산될 가능성이 보인다. 자신과 진실과의 관계는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설명이 환원이 가능해진다. 자기 돌봄을 이미 행하고 있는 ‘나’가 권력의 생산자가 될 수도 있으며, 타인이 만들어내는 ‘권력’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어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파레시아는 어떤 형태를 띄어야 할까? 이제 파레시아에서 ‘투쟁과 저항’은 빠질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의 생산지인 내면과 투쟁하고 저항하되, 자신에 대해 재판하지 않고 창조성을 가지고 드러난 권력에도 저항하는 힘을 얻어야 한다.
6. 이제 ‘자기돌봄’이라는 철학적 파레시아는 ‘투쟁’과 ‘저항’이 가미된 파레시아가 된다. 진실과 자신의 관계는 진실과 권력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은 약자이자 권력이며 우리는 누가 진실말하기의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푸코는 ‘투쟁과 저항’의 내면화를 하되 자기와 진실과의 관계의 조화는 또 하나의 권력을 생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니, 심판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되 더 능동적으로 그 힘을 재활성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성을 갖추고 수련하라고 말이다. 이 수련을 통해 우리는 진짜 우리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을 억압하는 드러난 권력을 길들 일 줄 아는 힘과 권력이 선용될 수 있도록 하는 창조성을 지닌 저항의 기술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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