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홀로코스트
1. “홀로코스트는 우연이 아니다.” 「홀로코스트와 현대성」이라는 저작을 통해 이 묵직한 이야기를 던진 지그만트 바우만은 사회과학 주변부에 있던 홀로코스트를 실천중심영역으로 끌어오길 원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사실은 정상적으로 간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과적 신화에 젖어서 홀로코스트를 자연스러운 역사적 경향으로 환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가진 의미를 훼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현대성이 과연 어떻게 극단적인 대량학살에 작용했는지, 어떻게 인간의 보편 도덕성을 능가할 만큼 현대성이 대량학살 과정에 작용했는가를 탐구할 것이다. 5장에서는 그 대상을 “피해자를 중심으로 설정하여 살펴본다. 현대성이 어떻게 피해자들을 스스로 희생시키도록 작용했는지 살펴본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가 자연스러운 역사적 경향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를 비교해보면 홀로코스트가 일반적 특성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현대성”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노사이드의 경우, 폭력의 대상은 소수 엘리트 집단이었다. 반면 흥미롭게도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엘리트에게 폭력이 아닌 권위를 부여했다. 살해당하는 자가 살해하는 자였다. 그 예는 ‘유대인평의회’다. 유대인 집단이었으나 유대인을 살해했다. 나치는 유대인 엘리트의 지도력을 유대인평의회 역할로 승화시켜 권위를 향상시켜주었다. 이렇게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관료적인 형식의 권력 구조에 지도자를 유대인 엘리트로 격상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유대인 제거를 위한 구조를 유대인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관료형식권력구조에 ‘유대인 엘리트’를 세우므로써 억압구조를 정당화시킨 것이다.
3. 유대인이 이 구조를 합리적으로 여기게 하는 것만으로 나치의 목적이 앞으로 나아가기엔 불충분했다. 유대인이 연대하여 저항하거나, 독일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비용이 많이 들것이므로 효율적 운영을 위해 먼저 나치는 유대인을 독일인과 격리시켜 이웃과의 연대성을 파괴기로 선택한다. 당시 위생에 대한 현대 문명의 감수성을 이용하여 위생과 보건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했는데, 이는 반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조건이었다. 그렇게 독일인과 유대인은 현대 문명이 가지는 매체를 통한 공포심으로 분리되어 갔다. 유대인들의 출구 없는 외로움엔 지식인들의 침묵도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침묵 역시 현대성과 관련이 있다. 독일의 대학은 가치중립적 활동으로서의 학문을 이상적으로 보았고, 도덕적 중립성이라는 원칙과 합리성의 추구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리와 외로움은 완벽해졌다. 놀라운 것은 유대인의 합리성도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연대할 이웃 없는 이들에게 결국 존재하는 건 유일한 행위자, 나치뿐이었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것은 나치의 반응을 예측하고 이에 맞추어 행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4. 그런데 이 분리는 게토 내 유대인의 공동체에도 시작되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유대인들에게 참여를 강요한 이 게임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서 유일한 가치관은 “살아남기”로 환원됐다. “규율”을 만들어내었다. “면제나 특별대우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면 그들은 보통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특수함’을 내세워 생존해야 했다. 그래서 서로를 다르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 권리는 모두가 소화해낼 수 있는 행위였기 때문에 집단적 특권의 이름으로, 생존전략은 개별화되고 분리되어 결국 연대의 힘은 증발되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권리의 희소성을 강요당하면서 공포심에 젖어 서로 특권을 빼앗고 억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보다 많은 이를 살리고자 했던 열망과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규칙과 만나 오히려 서로를 구별하여 행동하게 하므로써 나치의 억압의 합리성을 얻게 하였다. 이것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5. 그렇다면, 학살을 선택하는 유대인 협력자들은 선택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어서 현대성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논리와 합리성의 힘이다. 유대인들은 대량학살에 가담했다. 때때로 다수의 유대인 평의회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지언정 죽이지 마라”라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기로 선택하지만, 대게 지도자들은 살아남아 대부분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일부를 희생이 필요하므로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사형선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을 결정하기로 선택할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추구한 사람들은 사실 합리적 사고의 기술을 잘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행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이 불쑥 찾아올 때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합리성을 찾아야했다. 본질적 질문을 안고 사는 이라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논리”와 “합리성”이 학살자들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내지 않고 포기하는 이들이 없다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자들로 대체했다. 그래서 이런 명언도 있다. “누군가를 죽이기 원하면 신은 그를 미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6. 모든 설명이 가능해도 끝까지 남는 질문은 “어떻게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마저 이기고 대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이다. 도덕에 대한 무감각을 양산해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치는 비합리적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이 합리적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비합리적 상황에 제도에 복종하게끔 만들고, 독일과 분리시키고, 서로 격리시켰다면 이번엔 유대인 개개인의 마음을 떼어놓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라는 두 가지 한정된 질문에만 직면하도록, 다시 말해 더러워진 손을 갖고서만 살 수 있도록 직면하게 만들었다. 합리적 선택은 ‘내가 사는 것’이 최고의 행동기준으로서 합리적이며 사리에 맞는 것이라는 틀이 형성된다. 그렇게 살인의 공범자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선별적으로 생존하는 것이 이런 비합리적 상황에서 실행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게끔 환경을 만들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여기게끔 만든 것이다. 이제 ‘자기보존’이라는 최고 가치를 막게 하는 도덕에 대한 무감각은 당연해졌다.
7. 유대인평의회의 눈에는 게토라는 장벽이 유대인들을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격리하고 괴롭힘과 학살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달리, 독일 관료기구는 비합리적으로 절멸하려 했다. 사실 게토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독일인들에게 노동을 통해 자신들의 수익성을 입증하면 멈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보였던 이 선택은 사실은 권력을 쥐고 있던 독일 세력이 전쟁에 더 가담하여 세력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바우만은 우리가 이 이야기처럼 우리가 가진 합리성의 불충분함을 강조한다. 합리성을 행위자의 합리성(심리적 현상)과 행위의 합리성(행위자에 대한 결과로 측정되는) 두 가지로 나눈다면, 이성은 오직 “두 합리성이 공명하고 중첩될 때 좋은 안내자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의 경우 합리성은 자살무기가 되어 도덕적 금기를 무너뜨리고 대량학살을 생산해내었다. 유대인들의 합리성과 행위에 대한 결과는 행위자인 유대인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합리성은 권력을 쥐고 있던 나치에 의해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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